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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4 목회 칼럼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객관적 입장이라는 것은 거의 대부분 내가 경험한 범위 내에서의 주관적 객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진리 이외에는 진정한 객관이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진리라 할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주관적 객관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현실을 보면, 사람마다 나름대로 옳다고 생각하는 잣대가 다 다릅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 주관적 객관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하면 문제가 심각해 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주관적 객관이라는 것이 절대성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발생하는 문제들의 대부분이 이 주관적 객관을 무기로 사용할 때 생겨나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나의 주관적 객관으로 보면 분명히 틀려 보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지요. 하지만,  상대방은 동의하지 않고, 오히려 전혀 다른 나름대로의 주관적 객관을 주장합니다. 서로 자기가 더 객관적이고 옳다고 하면서 자신의 의견에 절대적인 비중을 두게 되면 관계에 금이 가고 급기야 그 관계는 깨어지고 맙니다.


내가 이곳 캐나다에 와서 절실히 느끼는 것이지만 캐네디안들의 멋진 토론문화가 우리에게는 잘 정착되어 있지 않다고 하는 사실이다. 물론 유교 문화권에서는 토론이라는 것이 거의 존재할 수가 없었다고 봅니다. 오랜 세월동안 상명하복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자신의 주장을 논리 있게 설득하거나 상대의 주장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그런 자세가 부족한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상대의 주장이 나와 다르면 토론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툼이 되어버리기 일쑤입니다. 단순히 방법상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 즉 나의 주관적 객관을 절대화하는 버릇 때문일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의 주장이 내가 동의할 수 없는 그런 것이라고 할지라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음을 인정해주고, 수용해주는 그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 공동체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 그리고 가치관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성숙도에 있어서도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백인백색의 의견이 개진될 때가 종종 있지요. 그럴 때에라도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서로의 의견을 들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내 의견을 접고 타인의 의견을 수용하는 그런 아량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진리의 문제는 옳고 그름으로 판단해야 하겠지만 그 외의 문제는 대부분 최선이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최선일 수도 있고 차선일 수도 있습니다. 충분한 토의와 심사숙고를 거친 뒤에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의견이 결정되어야  합니다. 이럴 때 비록 내 의견이 통과되지 않았고, 아직 내 의견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지라도 결정된 의견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성숙한 사람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결정하는 최선이라고 하는 것들은 결국 우리 공동체의 성숙도와 관계가 있습니다. 성숙한 만큼 성숙한 의견을 결정할 것이고 미성숙하면 미성숙한 수준의 의견을 결정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틀렸다고는 말하지 말고, 그 공동체의 수준에서는 그것이 최선의 결정일 수도 있기에 기꺼이 받아 들이는 것이 성숙한 사람의 태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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